A 최대규. 1950년.
B 이동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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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하시라는 이름은 어떻게 붙여진 겁니까?
A : 그건 나도 내용은, 나도 모르겄고, 함열읍 하시, 상시 그랬어. 근데 그것이 뭐냐면 시장 때문에 그렇게 유래가 된 것 같애. 아래시장, 윗시장, 쉽게 얘기허먼.
B : 사람들이 시장 보러 많이 왔습니까?
A : 그렇지, 여그가 저 이 근방, 낭산, 망성, 용안, 지금은 용동도 있지. 옛날에는 그냥 용안으로 하나가 돼있었거든. 근데 인제 용안이 면적이 크다보니까 용안허고 용동으로 나눠졌어. 그 다음이 성당, 웅포, 황등도 일부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이런 한 8개 면이 여기를 5일장을 보러 다녔지.
B : 상시에 일본인 상점이 많았습니까?
A : 마찬가지여. 하시도 있었고 상시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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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함열역이 생기고는 어땠습니까?
A : 여기는 인제 기차역전이 생기기 전에는 일개 부락이었어, 부락. 조그만한 부락. 산 밑에 이렇게 서민들이 사는 부락. 그랬는데 왜정시대 때 일본사람들이 기찻길을 놓는데 원래는 함라 쪽으로 갈라고 그랬어. 함라 쪽으로 갈라고 그랬는데 거기에는 이 근방의 대부들이, 쉽게 얘기허면 양반들이 살았었어. 그래갔고 양반들이 우리 양반 마을 앞으로는 기찻길을 못 낸다. 그래갔고 함열로 이렇게 해서 익산으로 내게 된 것이지. 그러다보니까 기차역전이 있다 보니까 인제 기차를 타러 이 근방 사람들이 다 모이는 거야. 외지 막 4키로, 5키로, 막 8키로 이렇게 떨어진 멀리 사는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대전을 가든, 서울을 가든, 전주를 가든 헐라면 함열로 왔단 말이여. 그래서 번화가 되기 시작했지, 기차역전이 생기면서.
B : 어떤 것들이 좋아졌습니까?
A : 특별한 건물보다도 그때 당시, 자유시당 때 함열에 병원이, 의원이 세 개가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허지. 자유시당 때믄 몇 년도냐…, 1948년대. 그러다보니까 인제 막 사람들이 기차를 타러 이렇게 막 주변 면 동네 이런 데서 오니까 4키로, 5키로, 막 7키로 이렇게 떨어진 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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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다니시기 때문에 미신에 대한 이야기는 흘려들었음. 성당면 나바위 성지에 대해 이야기 해주심. 신부님이 처음 들어오신 곳이라고 함.)
A : 돌산하고 흙산이 있어. 저쪽 동쪽에 보면 돌산과 흙산이라는 디가 있거든. 거기는 양쪽 산에 장수가 둘이 살었어. 둘이 살었는데, 인제 이쪽 장수가, 돌산 장수가 자기네 산 돌을 잡고 흙산에 있는, 산에 돌은 크단 말여. 긍게 그 돌을 자기네 산으로 뺏어올라고 인제 쌈을 시작을 했어. 그래가지고 돌산 장수가 흙산에다 작은 돌을 던지니까 흙산 장수가 참다 참다 성질이 나가지고 흙산에 있는 큰 돌을 돌산에다 던졌어. 그렇게 해서 결국이는 돌산이 큰 돌이 많아지고 흙산은 돌이 작은 돌만 있었고, 그런 전설이 있었는데 경지정리 끝나고 그 석산, 지금은 석산이라고 허지. 그 석산이 개발되기 시작해가지고 함열에 커다란 기여를 했었지. 경제 성장에. 그케 해가지고 돌아가신 정주영 회장님이 내가 죽기 전에 함열을 한번 가보고 싶다, 헐 정도의 유명헌 곳이 함열이었어. 왜냐, 경기가 좋으니까 이 저 현대 자동차에서 고급 세단차가 나오면 10명 가운데 한명이 함열 사람이 들어갔었어. 그렇게 해갔고 이 정주영 회장이 도대체 함열이라는 동네가 어떤 동네간디 이렇게 고급차를 사가냐. 그런 얘기도 있었어.
B : 돌산에 유명한 바위들이 많았다는데, 어떤 바위들이 있었습니까?
A : 연애바위도 있고 장수바위도 있고 다 있었어. 다 없어졌지, 인자.
B : 왜 연애바위라고 불렀습니까?
A : 남녀들이 인자 저 데이트를 많이 허니까, 연애바위. 그리고 거기 보면 장수가 오줌 싼, 여기 푹 들어간 디가 있어. 장수 오줌 싸서 푹 들어갔다, 그래서 장수바위. 그 다음에 이쪽에는 귀신바위 혀가지고 그 돌만 손으로 때린다거나 깬다거나 허면 사람이 죽었어. 그런 바위도 있어. 근디 석산 개발을 혀서 다 없어져 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