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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 구술사

개요

웅포면

곰개마을

구술일: 2013년 2월 24일
구술자: 이태일(1960년생)·남, 윤태용(1936년생)·남, 안일성(1935년생)·남, 윤맹용(1945년생)·남, 이남용(1937년생)·남, 유재선(1942년생)·남
면담자: 장윤준, 이순영

구술 요지

마을 유래담
전설 및 민담
민속
1) 마을유래담 :
- 웅포마을 : 곰의 형상을 닮은 포구.
- 금강 나룻터 : 나룻배로 길을 건너던 곳.

2) 전설 및 민담 :
- 용왕제 : 비교적 최근까지 지냈으며 정월 대보름날 풍어제와 함께 무사고를 빈다고 함.
- 새산신제 : 정월 초사흘날 지냈다고 함.
- 기우제 : 비가 안 올 경우 학교나 방죽에서 지냈음.
- 지는 쪽이 풍년 : 기싸움에 지는 쪽이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었으나 점점 분위기가 고조되어 서로지지 않으려 했었음.
- 관공서 : 원님 이외에도 포관, 현재의 파출소인 지서도 있었음. 경위가 나와서 일을 봤음.
- 웅포 팔경 : 나룻터, 덕양정, 봉화재, 소마 마을, 상제마을 등 여러 군데에 퍼져 있었음.
- 덕양정 : 사정터라고도 하며 어른들이 모여서 활도 쏘는 곳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없어짐.
- 최씨 일가 사고 : 배를 타고 놀다가 강물에 휩쓸려 배가 뒤엎어져서 무당이 넋을 건졌음.
- 술집만 70여호 : 술집이 너무 많아 그 수가 70여개였다고 함.
- 오곰개 : 일원산, 이강경, 삼법성, 사줄포, 오곰개라고 하여 다섯 번째로 큰 포구였다고 함.

3) 민속 :
- 기세배 : 기세배를 다른 마을과 하였음.
- 곰개시장 : 시장이 워낙 컸고 구체적으로는 강변마을에 있었음. 굴비도 팔았음.

문헌 내용

곰개(熊浦, 상웅-上熊)․나루밑=구레뜸 : 곰개는 포구 이름이 마을 이름이 된 것.‘나루밑’은 나룻터의 밑이라는 말.
『익산시사』

구술 영상

구술 채록

A1 : 이태일(54)-1960년
A2 : 윤태용(78)-1936년
A3 : 안일성(79)-1935년
A4 : 윤맹용(69)-1945년
A5 : 이남용(77)-1937년
A6 : 유재선(72)-1942년

B1 : 장윤준
B2 : 이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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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곰개 마을은 왜 곰개 마을입니까?

A2 : 그 저 개 포자 곰웅자 그렇게 해서 웅포. 그래서 곰개요.

B1 : 그럼 마을이 전체적으로 곰을 닮았다는 의미입니까?

A2 : 예. 여 뒷 산이 곰 형국으로 되어 있대요. 곰이 앉아있는 형국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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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옛날에 금강을 건너실 적에는 어떻게 건너셨습니까?

A3 : 나루로 인제 충남 서천 선산(?)으로 주로 선산으로 많이 가고.

A2 : 나룻배. 나룻배. 조그마한 목선. 그걸로 노 저어서 노 저어가지고 왔다갔다 했어요. 여기서 불르믄 여기서 오고 저기서 불르면 여기서 가고.

B1 : 굉장히 먼데 그게 가능합니까?

A4 : 또 기곗배도 다녔지 그 후로는. 옛날에는 노젓고 다녔고.

A3 : 그리고 인제 금강 연안에서는 이 웅포 곰 나루가 아마 역사가 길을 것이고 그것이 기록이 되 있기 때문이 현재에도 그 말이 오르내리고 있잖아요? 이 곰 나루라 하면은 이 금강에서 제일 역사가 깊은.

A2 : 아 곰 나루는 요새한 소리고 곰개나루여. 역사적으로 얘기를 해야지. 쭉 내려오는 얘기가 곰개나루지 곰나루는 요새 저 장사하는 사람들이 간판 붙이느라고 그렇게 했지. 여그 여 학교 교장선생님이 갖다 놓은 책도 그랬잖여. 곰나루라고 써 있는 것을 곰개나루라 고쳤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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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3 : 근데 옛날에 곰개 나루터 우기가 용왕제 모셨던 곳이 있어요 용왕제? 그리고 지금 가서 보시면 웅포 역사가 거기에 어느정도 써 있어요. 현판이.

B1 : 용왕제를 지내셨습니까?

A4 : 얼마 안되는디 끊어진지가 불과 3,4년.

A2 : 거그 가면 덕양정이라고 간판이 붙었는디 덕양정이라고 육각정인가 팔각정 지어놨는디 1970년도인가 국민두표 해가지고 거기서 일등해가지고 천만인가 얼마 보상받아서 짓고 그랬는디 그 전에는 거기 용왕제를 지내던 건물이 있었어요. 지금 그 서 쭉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디 그 계단 돌이 전부 주춧돌이여요. 씨커먼 돌로.

B1 : 용왕제는 언제 지내셨습니까?

A2 : 정월 보름날. 음력 정월 보름날.

B2 : 용왕제는 무엇을 바라면서 비는 것입니까

A3 : 쉽게 얘기허자믄 거기에서 사고 안나고 강이 깊으니까. 사고 안나고 지금 말하자면은 일년 동안에 이 주민들을 편안하게 해돌라는 그런 제조.

A4 : 풍어제죠 풍어제.

A2 : 풍어제 겸 사고는 뭐 사고는 우리 마을 사람들이 고기 잡는 배가 없고 저쪽 칠산바다니 고흥이니서 배가 증선배. 그 때는 풍선배여. 그 배들이 조기 갈치 뭐 잡어가지고 여기를 들와요. 그러면 여기서 객주가 그걸 위탁 판매를 해주지.

B1 : 객주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A2 : 아니 여기. 강 가에. 근데 그런 것을 많이 잡아 오고 사고 안 나고 긍게 하여튼 풍어제 겸해서 지내던 용왕제여. 그래가지고 굉장했어요. 막 3, 4동네 풍물이 와서 막 풍장 치고 술 먹고 그냥 그냥.

A4 : 이 달 내내 쳤지 이 달 내내.

A3 : 그래서 강변마을 농기가 올라가믄 저기가 용왕모시러? 그러면 각 마을 기가 와서 대기하고 있어요. 강변마을 기가. 그래서 맞이해요 맞이해서 같이 올라가요. 그 기가 안 나가믄 못 올와요 거기를. 용왕제 모시는디를. 인자 거기는 그렇게 돼 있고. 이 전에 한 가지 더 말씀 드리자 하면은 곰개 포구가 이씨 조선 그 중후에 우리 나라에서 5대 포구의 하나로 들어갔어. 일원산 이강경 삼법성 사줄포 오곰개였었어요. 원산이 일위로 꼽혔었어.

A3 : 근디 그건 제가 확실히 몰르는디 그 당시 제가 어렸을 적으 한 60 여 년 전에 그 때에 그 당시 그 7,80 세 된 노인 양반 그 양반한테 들은 얘기에요. 그게 아마 확실할 거에요. 그 분이 아마 살았다고 하믄은 백 한 3,40살 될것이에요.

B2 : 그럼 강경이 있었어도 이곳도 굉장히 컸나보군요.

A3 : 그렁게 지금 이 금강 연안에서 그 당시는 군산이 아주 적구 군산이 일어나면서 여그가.

A2 : 군산은 그 때 항구가 없었어. 그냥 지나가는 바닷가였지.

A3 : 왜그러냐믄 바다에서 강도 멀고 또 지역도 좁고 넓고 가찼기 때문에 군산이 일어나믄서 이 곰개가 망한 것이에요.

A2 : 여기서 포구가 되가지고 생선을 싣고 들어오면은 여기서 인자 객주가 상인들한테 팔어. 그러면은 상인들한테 팔어가지고 요새 영광굴비 허지. 여기서 굴비를 여기서 만들었었어. 영광굴비는 그건 조기도 아녀. 새끼 새끼. 여기서는 굴비를 어떻게 만드는 고니 이게 큰 그릇이다가 까부려가꼬 간을 해가지고. 간을 해가지고 여자들이 엮어. 이 지푸락으로 여자들이 엮어. 이 지푸락으로. 여자들이 지푸락으로 짬매서 맨들어가꼬 쭉 허니 다발로 짓고 노인네들이 엮어. 그럼 노인네들이 숫자 셔서 얼마씩 주고 재 놨다가. 재 놓으면 빳빳하니. 그러면 그 놈을 글대라고 있어. 이 양쪽 요새 말하자믄 개죽나무. 깨죽나무라 그러지. 그 것을 세워서 놓고 옆에다 솔나무 죽허니 해서 걸어놔가꼬 걸어 널어. 그래가꼬 말려서 내려가지고 그 가마니다 짝 매서 긍게 요샛말로 포장이지. 포장 해서 그렇게 해서 아마 대구까지는 가는 걸로 알았어. 홍어도 홍어도.

A3 : 그 당시 김천서는 조기 안가지면 제사를 못 지냈단 말여? 조기? 경상도 김천.

A2 : 홍어도 여기 배 들어오면은 전부 가마니다 담았어. 가마니다 담아서 그 놈이 말 구루마 소 구루마 그렇지 않으면 목탄차. 목탄차밖이 없었으니까. 그걸로 싣고 나가는 디 광주 사람들이 왜 그 화헌 홍어를 먹었나 나중에 생각 해봉게 그 놈이 가면서 다 삭아가꼬 썩어서 화했던 모양이여. 내가 광주 가서 봤지만 시장에서 사다가 단지에다 놔둬서 장둑에다 놔둬. 내가 광주서 군대생활 했응게. 그렇게 해서 먹드라고.

B1 : 그럼 우리 마을에 큰 장이 있었겠습니다.

A2 : 시장이 있었지. 오일장

A4 : 어마어마하게 컸다고 그래.

A3 : 긍게 여기서 고산까지 장 봐 먹고요 고산까지 여기서 소금이 가구.

B1 : 그럼 소금을 여기서 판매한 것입니까?

A2 : 그렇지. 저 섬에서 신안에서 나오며는 그 소금을 배로 싣고 와요. 여기로 들와. 그러면은 퍼 놓고 사람들이 사 가지.

A3 : 거기서 덧붙여서 내가 한 말씀 할 것은 그 당시 소금이 그 때는 쌀금보다 더 비쌌단 말이여 지금은. 지금잉게 소금이 싼 데 그 때는 쌀 한 말하고 소금 한 말 하고 바꾼다 그러면 소금을 안 바꿨단 말이여. 왜정때도 그와 같이 귀했는디 모 객주집. 객주집을 한 집에 들어오는 소금 배가 사십배. 사십배였는디. 물론 많이씩은 못 싣지 풍선에 조그마한 데에 실응게. 헌데 소금을 다 퍼서 그 안에다 쌓고. 장질을 내서 그 소금값을 치러줄 만한 돈이 있었다 그 말이여. 그래서 한 집서 하루에 사십배를 펐어. 그렇게 크고.

A2 : 고산에서도 솥단지 지게에다가 달고 뭐 쌀 달고 반찬 김치랑 달고 짊어지고 와서 오다가 밥 해 먹고 여기서 소금 한나발 짊어지고 고산까지 갔대.

B2 : 그럼 우리 마을에 부자가 많았겠습니다.

A4 : 객주들은 큰 부자였지.

A3 : 인자 확실히는 모르는데 함라가 부자가 많았을 테지만은 확실히는 모르는데 그 노인 양반. 아까 그 오개포 하나라고 말씀허신 양반이 뭐라 했는거지 그 때는 익산시 이리읍이었다 그 말이여. 그 시가 아니고. 이리시는 815 해방과 동시에 탄생한 것이여. 그런디 익산 군에서 군이라 하믄 이리읍까지 포함이 되는디 이 강변이 경제가 상당히 좋았단 소리를 내가 들었어. 이 곰개마을 이 일대가.

B1 : 그럼 우리는 시장을 보러 강경까지 가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A3 : 옛날에는 컸었고. 이 충남 저 서천 한산면 한산면 사람들도 여기 와서 장을 많이 보고. 보통 평일에도 여기 밑에 보이죠. 여그. 이게가 70년 지금 말하자믄 포구 끝나갈 무렵이에요. 끝날 무렵이거든요 이 때가. 근디 이 뒤로 얼매 안 있다가 하구둑 생겼는데 그 조금 때에 백여척 이상 들어왔었어요. 한 조금에.

A2 : 지금 여기가 장을 오일장을 섰거든. 일일날 육일날. 근데 이 건너가 한산면이여 한산면.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그러고 바로 그 옆이는 부여군 양화면이고. 근데 거기서 나룻배로 쌀을 가지고 와서 여기서 샀어. 팔아서 냈어 여기서. 우리도 그거 다 봤어.

A3 : 한가지 더 말씀을 한다고 하자면 그것도 인제 그 노인 양반한테 들은 얘긴디 이 산넘어 해서 들 넘어 해서 곡식을 다 해서 여기서 배를 싣고 금강 하구로 해서 서해로 해서 수도권에 두고 그 뒤로 또 인제 일제 침략 헌 뒤로는 아마 여로 해서 여로서 먼젓번에 방송에 어? 성당서 한다고 방송에 나오더만 실지 여기서 헌거로 우리는 알고 있어.

A2 : 14후퇴 때 우리 집 이 파출소 뒤에 노적물을 무지하게 쌓아놨었어. 그 때 상환료를 내기 때문에 지주들 논값주는 것을 상환료라고 하지. 그걸 무지허게 들어왔었어. 그 14후퇴때 그 놈을 뭐 고군산인가 어딘가로 실어간다고 전부 다 실어갔어. 그리고 여그 뿐 아녀. 이 산 넘어 먼 데서 까지 전부 지게로 한 가마니 짊어 져 날랐어. 그리고 여기서 나갔어.

A4 : 섬에서 장작도 들어왔어. 장작. 이 섬에서 장작이 들어왔다니까. 긍게 여기가 아주 다 판매하는 큰 시장인가봐. 그 쪼그만 배가 뭐여. 몇 백갠가를 모르겠당게. 앞 뒤가 무턱헌 놈이 있어 막 엄청 커요 그걸로 실었는디 소금 가마니가 이맨허게 보이드랑게 그서 봉게 얼마나 많이 쳐 실었나. 그게 몇 십 톤 짜리여.

B1 : 그럼 일제시대에는 여기서 쌀을 모았던 것이군요.

A2 : 그렇지 군산으로.

A3 : 군산으로도 갔지만 여기서도 한양으로도 올라갔다 그거지.

B2 : 그럼 언제부터 시장이 서서히 쇠퇴했습니까?

A6 : 에에. 칠십년도 전에 전에. 오십년도나 됐는가보나. 오십년도나 됐는가봐. 근데 우리 시장이 폐쇄된 것을 따지자면은 1950년대쯤 되는 것 같어. 내가 65년도에 대학교 졸업했는데 그 때 시장이 안섰어. 그렁게 내가 생각하기에 50년 중반쯤 해서 안됐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여.

A4 : 오백 세대가 살았드리야. 이 좁은 바닥에도 오백 세대가. 호 수가 오백 채였드래요. 그리고 술집이 70가구라 했다 그러더라구. 술집이. 어마어마 하더라고.

A3 : 술집 숫자가 하도 많응게 술집 숫자를 실 수가 없다 그 말여. 그래서 한 사람이 뭐여 저 그 때는 동전 그걸 놓고서 한 집에 놓고사서 한 잔씩만 나시고 동전을 세어보니까 일흔 여섯 개가 들어갔다 이 말이여. 그렁게 이 동네가 술집만 일흔 여섯 개였다 이 말이여.

B1 : 그럼 여기가 이곳이 돈이 굉장히 많이 모였겠습니다.

A6 : 그렁게 말여 선생님 말여. 그 당시 익산군에서 세금의 삼분의 일을 웅포면에서 문다고 소문이 났었어. 그러면 얼매나 말하자믄 금전관계가 왔다갔다 했는가를 알 수가 있어. 세금의 삼분의 일을 이 웅포에서 문다고 소문이 났었당게.

A4 : 아 배가 저 배가 사십톤 크라스여. 사십톤. 사십톤을 조기 사십톤 씩 싣고 들어왔어. 챠. 수억원어치네 지금 계산하면. 조기 한 마리에 만원짜리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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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그럼 관공서도 일찍 들어왔겠습니다.

A4 : 조선시대에는 포관이 있었드리야. 조선시대에. 긍게 원님은 햄열읍네 함라가 있고 여기는 포관이 나와 있었드리야. 파출소 식으로 나왔드리야.

A6 : 그 당시에 우리 말하자믄 지금은 파출소지 옛날엔 지서잖아. 지서. 지서가서 그 경위가 와서 지서하는 디가 없었어. 근디 그 당시에 우리 웅포 포구가 있을 때는 경위가 와서 지서장을 했다는거여. 지서에 와서. 지금으로 말하자면 파출소가 지금 현재로 말하면 지서. 그래서 경위가 여기 지서장으로 나와 있었다고 하드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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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웅포 팔경이란 무엇입니까?

A2 : 웅포 팔경이 지금은 인자 저쪽 주유소 있는 디 지나서 거기서 강경 군산 나가는 나룻배. 그것이 거기서 그 근방이 팔경 하나 들어갔고. 여기 덕양정 밑에 거그 하나 들어갔고. 그 다음에 선비바우라고. 에 저그 봉화재 산 중턱에 있어요. 거기허구. 그 다음에 곡창 지나서 소마에 도롯가에 큰 소나무가 쭉 있어요. 그 동네 허기허구 그 다음에 상제마을 한 군데 있고. 원대봉 가서 하나 있고. 에 지금은 상제 다 막 부셔가꼬 해놨는데 솔나무도 있고 그랬는데. 아 숭림사가 하나 있고.

B1 : 선비바위는 왜 선비바위 입니까?

A1 : 옛날에 막 선비들 가서 쉬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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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덕양정은 무엇입니까?

A2 : 덕양정은 지금 보건소 뒤에가 있었는데 있어가꼬 에 사정터라고 지금 그랬지. 근디 거기서 노인 양반들이 궁도 활 쏘는거. 그거를 했어. 거기서. 그래가꼬 그 여그 사는 사람 한 명필인데 그 양반이 덕양정 그걸 써줘서 것다가 붙여놨었거든. 근디 그랬는디 거기서 역사가 이루어진 것을 일본놈들이 제지를 했어. 그래가지고 못허게 해가지고 저 학교를 했어. 보명학교라고 해가꼬 처음 시작을 했지. 그래서 그 학교를 뜯어다가 그 학교에다가 새로 지었지 인자. 새로 지어가꼬 그게 1908년인가 그렇게 되얐는데 그 뒤로 이 웅포 초등학교 명칭이 바꿔져가지고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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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산신제는 지내셨습니까?

A2 : 에 산신제는 지금도 제는 안지내는 데 건물이 남아 있어.

A4 : 에. 각이 있어 있어.

A2 : 마을 주민들이 다 모여가지고. 한 보름간 날마다 모여가지고 제사 지내는 사람이. 이 용왕제도 그랬어. 인자 마을에서 장만하는 돈은 걷어서 해가꼬 장만해가꼬 거기 가서 제사 모시고 막 풍물 치고 놀고 그랬지. 그게 정월 초 사흘날 그랬어.

B1 : 기우제는 언제 지내셨습니까?

A2 : 기우제는 나도 그거 한 두어 번인가 봤는데 기다리다 기다리다 비가 안오니까 비좀 와주십사 하고 여름에 보리탈곡 한 후에 보릿대 갖고 막 학교 운동장 가서도 혔고 저 방죽에서도 물이 말랐응게 거기 가서도 혔고.

B2 : 그거 외에 또 마을 축제는 있습니까?

A2 : 인자 정월 설날부터 인자 저거 초사흘날 산신제 지내고 항게 그때까지 쭉 치고 또 보름 때 용왕제 지내면서 풍월을 며칠 막 치고 그랬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풍월을 치고 술 내고.

A4 : 그것이 뭐 져주면은 풍년이 드네 어쩌네 그래서 유래가 있어서 그랬나 풍물치고 나면 꼭 싸움나고 기싸움 나고 그러드만. 그게 그 유래나서 그런거 같애. 풍년든다고 져주면은. 근데 지나 술바람허믄? 더 이겨먹을라고 하는디. 그래서 큰 싸움이 나드라고. 내듬 잘 지내다가 보름 때만 되면.

A5 : 섣달 그믐이 되면은 서로 했던 것이 말을 안헌다 이 말이여. 말을 안타가서 정초에 풍물치면서 기 싸움을 혀. 기 싸움을 혀고 난 뒤에 형님 동생이 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인제 봄부터 여름 가을까지 지내다가서도 겨울 들어가면 섣달 돌아오면 음력 12월잉게 그 때 돌아오면 또 말 안혀. 않다가서 인제 쌈 난다 그 말이여. 저 정초에 풍물 치면서. 그러면서 그것이 반복이 됐어.

A4 : 아 잘 지내다가. 허허. 이 쌈도 보통 허는 것이 아니라 치밀허게 하드라니까요. 깃대 찢어지고 부러지고. 치고 박고 피가 질질 나고. 파출소관에서도 마당서도 하드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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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그런데 강이 옆에 있어 물걱정은 없었겠습니다.

A2 : 지금잉게 그러지 그 왜정때부터 죽 허니 물 때문에 고생 무지허게 헌 데여.

A6 : 하구둑으로 막아져가지고 여가 물 걱정이 없지 물 걱정이 최고 많은 데가 여기 우리였었어.

A3 : 천수답 천수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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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물은 몇 개나 있었습니까?

A2 : 우물은 한 너댓개씩 되얐지. 그래도 우물물이 짜서 먹기가 곤란항게 여쪽 건너 당살메라고 하는 산이 있어. 거기서 물 지개로 양쪽으로 두 개 지개 만들어가지고 거기서 퍼다가 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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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우리 마을에 무서운 이야기나 슬픈 이야기는 뭐가 있습니까?

A2 : 여기서 뭐 한 최씨들이 뭐 누구더라나 최XX선생이라나 누구라나. 그 분들이 여기서 뱃놀이 하다가 여쪽 저쪽 나룻터 첫뻔 나루터 거기에서 바다 물살 강이 깊어가꼬 물이 돌아. 거기 가서 배가 돌아가꼬 뒤짚혀서 뭐 많이 죽었대.

B1 : 그럼 그 사고가 있은 후 무당을 불러 넋을 건지거나 하였습니까?

A5 : 에. 에. 조리로 이렇게 젓어가지고 넋을 건지면 머리카락 세 개가 나오면 넋을 건지고 혼이 나왔다 해가지고 그런 게 있었어요. 그렇게 많이 혔어요. 배를 타고.

비고

면담장소 : 금마 갈산마을 마을회관
면담시간 : 2013년 2월 24일 16시
내용 : 마을 유래담, 전설 및 민담, 민속에 대한 인터뷰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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