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이상열. 1958년.
B1 박태건.
B2 이동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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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포에서 4대째 살고 계심. 춘포의 유래와 역사에 대해 개인적으로 조사하신 적이 있음.)
B2 : 여기를 무슨 마을이라고 합니까?
A : 여기가 신촌인데 말 그대로 인자 새로운 마을이 형성이 됐다는 거거든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방이 축조가 되면서 여기에 인제 이주를 한 거예요, 원근 각지에서 와가지고. 왜그냐면 평야가 굉장히 좋거든요, 여기가. 그리고 인자 춘포로 보면 춘포에 그 지형이 장방형이에요. 쉽게 말하먼 고구마 같은 형입니다. 그래서 춘포를 크게 보면은 천서라고 허는 디가 하나 있고, 여기가 지금 옛날 대장촌이에요. 대장촌인데 인제 이 대장촌이라는 것이 해방 50년 되는 해에, 1995년도 같은데, 45년도에 해방이 됐으니까. 일본의 잔재문화를 좀 없애야지 않겠냐 해가지고 원래는 익산군 춘포면 대장촌리를 익산군 춘포면 춘포리로 개명을 했어요. 그래갔고 대장촌이라는 이름이 없어졌습니다. 근데 옛날에 시내도 가면 똑같으고 저 같은 경우도 대장촌이라는 말이 더 친근감이 있죠. 우리 학교 다닐 때는 대장촌이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이 마을은 인자 신촌마을이고, 춘포리 옛날로 따지면 대장촌리가 여기 회화마을이 일번지예요. 회화마을이 일번지가 된 이유는 뭐냐면 옛날에 인자 만경강이 이 두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이 제방 저쪽 뒤쪽은 일본사람들이 새로 만든 강이고, 옛날에 일본사람들이 제방을 중축허기 전에는 굽이굽이 만경강 구강이 있어요. 그 구강의 본류에 의해서 춘포리 일번지가 형성이 된 거예요. 그래서 그 춘포리 일번지는 선박이 정착하는, 큰 선박은 아니고 뭐 쪼그만한 교통수단의 어선, 이런 것들이 정착을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여기 대장교회가 역사가 지금 제가 알기로 110여년 됐는데 그것도 외국문물, 쉽게 말허먼 서양의 문화가, 뭐 기독교 계통 아니겠습니까? 그 문물을 굉장히 빨리 받은 거죠. 그리서 알기로 익산의 남전교회 외에 등등 몇 개 빼놓고는 아마 역사가 굉장히 오래 됐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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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춘포라는 이름이 봉개에서 따온 이름이 맞습니까?
A : 맞습니다. 그것은 인제 여기 춘포에 보면 봄개, 원래는 이게 봄개산입니다. 지금 저희들이 인자 명칭은 봉개라고 하는데 제가 볼 때는 그 어원의 변화에 의해서, 여기가 동네가 지금 봉개라는 마을은 있어요. 봉개가 인수리 화평마을 그 옆에 신화마을, 완주군 어전리 신평마을, 세 개를 합쳐서 봉개라고 하거든요. 근데 지금 여기가 잘 아시겠지만은 춘포면에는 유일허게 산이 하나 있어요. 그게 아까 말한 봉개산인데 그 어원을 따지면 이게 원래는 봄개라는 거예요. 그래서 봄 춘 자에다가 포구 개포헐 때 포 자. 그래서 춘포의 역사는 봄개산에서 이루어졌는데 봄개라는 표현보다는 봉개가 좋지 않겠냐, 이렇게 인자 추측을 하시더라고요, 어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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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봄개는 왜 봄개입니까?
A : 그러니까 인자 그것을 왜 어른들이 거기를 봄개산으로 했나 그건 모르겠지만, 이게 인자 춘포의 역사를 보면은 여기가 옛날에 뭐 콩 두, 콩 비슷허게 해가지고 두촌리라고 그랬다고 그래요. 긍게 두촌리라고 그거에 대한 역사적인 유래는 면사무소에 가면 있어요, 그게. 근데 제가 볼 때 이 지형이 좀 그런 것이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은 제가 조금 해보고 있습니다. 정확허게 어르신들도 그건 잘 모르더라고요, 왜 거기를 봄개산이라고 했느냐. 근데 이럴 수가 있어요. 지금 보면은 그거 인자 중국문화를 우리나라가 많이 받었잖아요. 여기가 지금 보면은 그 장례를 치룰 때 매장할 수 있는 곳이 없어요. 왜 그냐면은 잘 아시다시피 여기가 전부다 평야다 보니까 산이 거기 오로지 하나 있어요. 그래서 이쪽에, 지금으로 따지면 여기 저 동산동이라고, 행정구역상 동산동인데 법정동으로 따지면 석탄동이 있어요. 바로 옆에 석탄동이거든요. 그 석탄동도 제가 알기로 인자 이렇게 제방이 축조가 되면서 들어온 분들인데 거기가 옛날에 춘포면이었습니다. 에뚜기까지 춘포면이었어요. 지금 우리가 이띠기라고 하는 데. 긍게 이띠기 쪽 바로 보면은 신복리, 용광리라고 허는 석탄동이 있는데 그분들도 전부다 장례문화는 여쪽 춘포산으로 갔어요. 인자 전부다 상여 매고 가는 거죠. 그래서 그 옛날에 보면은 중국에 뭐, 봉래산 이런 게 있어요. 그런 어떤 거에 의미가 좀 있지 않겠나, 제가 볼 때는. 그래서 저희들이 인자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면 봉개산에 깨 팔러 갔다, 이렇게 표현을 했거든요.
B1 : 봉개산에 깨 팔러 갔다는 게 어떤 의미입니까?
A : 그러니까 인자 운명을 하신 분을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어른들부터 그건 내려오는 어떤…, 근데 그 뜻을 깨 팔러 갔다, 돌아가신 분에 한해서 그렇게 인자 표현을 썼거든요. 근데 그것은 정확허게 왜 유래가 그렇게 됐는가는 제가 정확히는 모르는데, 저희 어렸을 때, 저희 초등학교 다녔을 때만해도 봉개산에 깨 팔러 갔다, 요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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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옛날엔 춘포가 포구로 유명했습니까?
A : 유명했다기보다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인자 만경강을 두 가지 표현을 했어요, 우리 초등학교 때. 우리가 어렸을 때 구강, 새강 그랬습니다. 구강이라는 것은 옛날 구 자, 오래된 강. 새강은 인자 신강이에요. 새터, 새터민 이런 식이죠.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만경강 제방 뒤쪽은 새강이에요. 새로 놓은 강. 그리고 옛날 길은 구강이 있습니다. 그 구강이 현재 현존허고 있어요. 그게 어디냐면 춘포초등학교 바로 뒤에 보면 강줄기가 쭉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보니까 이 강의 형태가 저쪽 지금 완주군 쪽에서 이렇게 내려오는, 발원지가 그쪽으로 제가 알고 있거든요. 근데 거기서 오다보면 계속 이런 식으로 이렇게 흘러왔다는 이야기예요. 흘러오면서 이걸 일자로 잡은 거죠, 일본사람들이. 그래서 이쪽에 그 강을 넘어가면 구담이라는 마을이 있어요. 거기도 춘포리 구담마을인데 구담마을이 옛날에 익산군이었고요, 지금 현재도 거기는 익산십니다. 근데 옆에 바로 하신마을이라고 있어요. 거기는 인자 구강에, 구강의 북쪽은 김제시였었어요. 그런 것이 지금도 남어있어요. 긍게 구강의 북쪽은 익산시고 남쪽은 김제시였었어요. 그래서 우리 어렸을 때만해도 그게 하신마을, 그 마을이 옛날에 김제군였었어요. 그것이 구강을 중심으로 지역이 설정이 된 거죠. 그러면서 새로 이쪽 만경강이 생기면서 구강 저쪽 구담마을 주민들은 춘포가 정서적으로 익숙하니까 우리는 안 가겠다 한 거고, 이쪽에 있는 하신마을이나 신복리 신복마을이 있어요. 신복마을도 똑같이 구강의 흔적이 있어요. 그쪽이 남쪽이에요. 그 사람들도 김제시였거든요, 김제군이었는데 그 사람들은 우리는 춘포로 그냥 가겠다 해서 옛날에 춘포면이 됐다가 지금은 인자 동산동으로 행정구역상, 그것이 보면 그 자락이 지금 표시가 돼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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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도깨비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A : 그것은 저도 우리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그 옛날에 도깨비가 있었다고 그래요. 그 아버님 친구분이 바로 옆에 동네가 갈리라는 마을이 있어요. 원래는 간리죠. 그 뜻은 뭐냐면 사이 간 자예요. 긍게 이쪽 그 대장촌이 춘포리하고 신복리라는 꽤 큰 동네가 있거든요. 그 사이에 끼어 있어요. 그래서 인자 원래는 간리, 사이 간 자 써가지고 간린데 표현상 갈리로 나오는 거죠. 근데 거기에 인제 아버지 친구분이 그 처가가 있었는데 밤에 다녔을 거 아녜요, 바로 웃동네니까. 근데 직접 도깨비를 목격을 하셨다고 그러니까.
B1 : 어떻게 목격을 하셨답니까?
A : 두 분이서 거기를 갔다 밤늦게 오는데 뭐 도깨비가 나타나가지고 이야기도 허고 어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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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철도와 관련된 재밌는 에피소드는 없습니까?
A : 여기가 인자 전주 딸촌이라고 그래요. 딸촌이라는 데가 전라선의 딸촌은 여기 대장역이고 군산선의 딸촌은 대야예요, 대야. 근데 그 딸촌이라는 명칭을 처음에 붙인 사람들이 원광대 다녔던 선배들이 붙였거든요. 그 이름을 왜 붙였냐면 원광대학교가 인자 한참 그 뒤에는 스쿨버스가 다녔는데 그전에는 전부다 열차로 다녔어요. 그래서 전주, 옛날 구역이 있지 않습니까? 덕진역이 있었어요. 지금 전북대학교 덕진광장이 옛날 덕진역이었는데 그분들이 거의 다 열차를 타고 다녔어요, 원광대학교를 다닐 때. 그다보면 전주에서 통학열차가 있잖아요. 근데 그때는 통학열차가, 그 열차를 놓치면 학교를 못 가요. 그래서 하여튼 그 열차를 타야 돼요. 열차를 타야하는데 이 원근, 이 주위에 있는 학생들이 전부다 춘포역으로 왔어요. 춘포를 오는데, 여기가 그 뜻은 뭐냐면 좀 부촌이었어요. 옛날에 여기 제가 알기로 여기 땅 한 평 팔으면 팔봉이나 금마 쪽에 가면 땅 서너 평을 샀었어요. 그 정도로 이쪽이 옥답이었죠. 그러다보니까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저희 때 보면 초등학교 졸업하면은, 제가 인자 70년도에 초등학교를 졸업을 했는데, 70년도에 다른 데 같은 경우는 중학교를 가는 학생들이 별로 없었어요. 특히 여학생에 한해서. 근데 여기는 반절 이상이 중학교를 진학을 했어요. 그 이야기는 뭐냐면 경제적인 여건이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되니까 가르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다보니까 그 여학생들, 이 근동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다 춘포역으로 왔어요. 춘포역으로 왔는데 춘포역에서 인자 그렇게 있으면 남학생들은 바깥으로, 주변으로 있고, 여학생들 이렇게 뭉치는 힘이 강하잖아요. 긍게 플랫폼, 플랫폼에 여학생들만 있는 거예요. 그다보니까 전주에서 통학하는 원대 선배들이 딸촌이라는 이름을 그래서 지어준 거예요. 그래서 지금 대표적으로 보면 농지가 좀 광활하고 옥토가 있는, 이 대장촌이라든가 대야라든가 요런 데가 다 딸촌이죠.
(춘포역사가 가장 오래 됐다. 1914년에 역사가 만들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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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은 장사를 위해 유동하는 일인들이 많았고, 실제 거주민의 수는 춘포 쪽이 높았다.)
A : 여기에 지금 일본사람 농장이 네 개가 있었다고 그러거든요. 농장이 네 개가 있는데 가장 큰 농장이 여기 이 호소까와 농장이라고, 그 일본 총리를 하신 할아버지가 했는데 그때 당시에 한 삼천 정보, 그러면 칠천 한 오백 필지를 여기서 경작을 했다고 그래요. 긍게 전부다 소작들이죠, 나머지 한국사람들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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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춘포에 유명한 명당자리는 없습니까?
A : 여기 춘포는 명당자리라는 말이 있어요. 어디냐면 천서초등학교 뒤쪽이거든요. 뒤에 그게 제가 알기로 구명산으로 제가 알고 있어요. 긍게 아홉 개의 명당이 있다 해서 구명산이라고 이야기하시는 분이 계시거든요. 지금 천서초등학교 바로 뒤쪽에서 골프장 나가는 길, 거기가 인자 구명산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담월마을 최한규 어르신을 뵈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라는 내용.)
A : 이쪽은 하여튼 명당 이런 건 별로 모르겠어요. 근데 여기 구담마을이라는 디 가면은 논에 묘가 있어요. 지목상 묘지가 있어요. 이 일본사람들이 그렇게 묘지를 썼다고 그런 거 같애요. 구담마을 제방 바로 넘어가면 제방 밑에다가 이렇게, 지금도 그 묘지 변호(?)가 있대요, 지목상. 근데 일본사람들이 거기다 묘지를 썼다, 이런 말이 있고, 제가 인자 들은 이야긴데 여기 지금 춘포면 소재지 좀 지나가면은, 옛날에 인자 소로 논도 갈고 그랬잖아요. 근데 어느날 트렉타가 인자 와가지고 심경을 허다보니까 거기서 저기가 나왔대요. 그 항아리 같은 게 나왔는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 그 사람이 죽으면 매장도 했지만은 거기다 넣은 모양이더라고요, 항아리 같은 데다가. 그렇게 해가지고 물이 뭐 굉장히 맑은 물이 있었다, 그게 보약이었다고, 이런 말도 있어요. 그니까 인자 사람의 시체가 썩었을 거 아니겠습니까? 썩으면 이것이 배출이 돼야하는데 배출이 안 되고 인자 그대로 있는 상태니까, 이놈을 인자 어른들한티 물어봤을 거 아녜요? 긍게 인자 애장이다, 뭐 요런 이야기를 하니까 그걸 갖다가 먹으니까 몸에 뭐 좋았다.
B1 : 그 이야기를 언제 들으셨습니까?
A : 언제쯤 들었다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했으니까.
B1 : 그때가 언제쯤입니까?
A : 한 20년 됐나? 제가 알기로 거기가 덕실리 쪽일 겁니다.